In anticipating tomorrow, one loses today..
또 다시 고통만이 남아,
만약 인간이 이중적이라면, 그것은 육체적인 인간에 사회적 인간이 중복되기 때문이라고,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말했었다.
지성이라는 이름을 빌린 사회적 인격과, 그것의 존재를 구성하는 육체의 인격.
그 상극하는 모순만이.. 나의 전부였다.
假.
사회적 인격을 부여받은, 가면이라 이름 붙여진 나는 지극히 이기주의였다.
자신만을 위해 살고, 오직 자신 안에서만 의미를 찾았기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찾을 수 없어 삶을 버렸던 것처럼.
그건.. 가면이라는 이름이 의미했던대로, 거짓이 아닌 진짜를 찾고 싶다는 행위였다고..
이제서야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게 됐다.
'그 어디에도 의미는 없었어..'
그래서 자신의 안에서 의미를 찾기로 했다.
오직 자신만을 향한 사고의 종착역은 '지나친 개체화' 라는 곳 하나 뿐.
의식이 본성을 거역하고 개체로 절대화된 시점에서 이미 가면은..
더 이상 외부와 소통할 수 없다고 하는, 허무를 만들어버린 거다.
그렇게 외부에 허무를 만들어, 자신의 내부조차도 허무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허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오직 허무 뿐이기에.
그런 식으로 밖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렇게 남겨진 건 자신의 비참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에게는.. 둘이라는 축복이 타인이라는 공포 밖에 없었으니까.
허무에 잠식되어간다.
내적 허무 속의 병적인 환희와 영원이라 이름 붙인 허무에 매료된 자각.
답은 하나였다. 생존을 완전히 중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그 허무를 쫓기로.
사고한다는 것은, 행동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사고하는 만큼 삶을 포기한다.
환멸적인 무미건조함만이 남아있는 현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렇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삶의 고통을 견디면서까지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까.
그 허무라는 무한의 저주 속에서 그대로 죽어버릴 지라도 상관없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죽을 수 있다면, 그건 거짓이 아닌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국 타인의 요구에 의해 생겨난 거짓이지만, 나는 진짜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그 끝만큼은 진짜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거짓이 아닌, 진짜로서 죽고 싶다-, 고.
그러면 당신들은 나를 진짜였다고.. 기억해줄까..
異.
육체의 인격을 부여받은, 이면이라 이름 붙여진 나는 이타주의인 동시에 아노미였다.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은 영원한 불행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행위인데도,
이면은.. 그 달성될 수 없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목표를 쫓았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정말로, 행복해졌으면 했다.
도저히 이룰 수 없더라도 무한이라는 그 허무를, 행복을 쫓고 싶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건..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는 한,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하고 의미도 없으니까.
언제나 실망할 뿐이었다. 언제나 좌절 뿐이었다.
언제나.. 내가 지켜낼 수 없는 행복이 눈 앞에서 무너져만 갔다.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좌절의 한계를 초과하게 함으로써 환멸과 실망에의 길을 열어버린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이 아니었을까..
그곳에 있던 건.. 오직 자신을 향한 광기에 찬 분노.
왜 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없는지, 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는지.
왜 나는 주위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지.
어째서.. 나는 모두를 불행하게만 만드는 걸까.
그건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니었기에, 더욱더 화가 났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고 인정해버린다면,
자신이 추구했던 목표마저도 부정해버리잖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목표 자체는 틀리지 않아.
행복해지고 싶다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행복의 추구가 잘못될 리는 없으니까.
만약 틀린 게 있다면 그것을 이루고자 했던 수단으로써의 자신.
그렇게 스스로 자신에게 확실한 것을 줄 수 없는 만큼, 자신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나도 무가치했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을 가치있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물건'을 막 다룬다거나, 상처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으니까.
이미 자신의 그릇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가져버렸다면, 없애버릴 수 밖에.
이건 서로의 가치를 저울질해가며 이루어지는 살인 행위가 아니다.
타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된 것은 오직 나 하나. 소멸하는 건 무가치한 자신 하나면 되니까.
나는, 무엇하나 이뤄낼 수 없었기에..
그래서 소멸하기로 했다.
영원한 꿈은.. 행복할까. 부디, 그랬으면.
내가 소멸한 세상에서, 남겨진 당신들은 행복해질 수 있기를..
가면은 자신의 껍질을 깨지 못하고 자신만의 꿈 속에서 죽었다.
이면은 이룰 수 없는 꿈의 무한함 속에서 죽었다.
살아있다고 믿었던 건, 그저.. 내 착각이었던 거다.
그리고.. 허망한 흥분과 광기에서 깨어난 후, 분노에 찬 경멸만을 가진 나만이 남아있다.
허무를 향한 병적인 환희도 없다. 가면처럼 죽고싶지는 않으니까.
그저 내면의 허무는 여전히 존재해서 현실을 침식할 뿐.
더 이상 나은 것을 바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이면처럼 죽고싶지는 않으니까.
단지 그릇에 넘쳐 흐르던 감정은 모두 소멸해서,
근원조차 잘려나간 것처럼 무미건조함만이 남아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 속에서, 허무의 나락으로 소멸해간 시간.
가면은 죽어서도 거짓된 채로 부정당하고, 이면은 죽어서도 행복에 다다를 수 없었다.
...그야말로, 허무한 몸부림이었다.
어디까지나 기억으로써, 그것도 오직 나만의 기억으로써 기억될 그들은..
존재했다는 의미조차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최소한 나만이라도, 끝까지 그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다못해 흔적으로나마 기억될 수 있기를.
이런 무의식적인 투영만이 그들이 살았던 현실과 나의 유일한 끈이니까.
그래서 용서할 수가 없다.
그래서 환멸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하찮은 이야기다.
그저 혐오만이 침전될 뿐인 시간.
나는 결국 가면도, 이면도 될 수 없는 그들이 남긴 껍질일 뿐..
그저 비정상의 범주에 속할 뿐인 이레귤러.
그래서 언제라도 의미가 없어진 생존을 끊어버릴 수 있는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것을 에피쿠로스적 자살이라 부르던가.
언젠가 소멸할 나 역시도, 그들을 따라 허무 속에서 죽겠지.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일테니까.
그렇기에 하찮은 날이다, 오늘은.
의미 없는 날을 의미 없게 하는 것만큼은.. 최소한의 의미가 있을테니.
피가 아니면 소통할 수 없는 너와 나는.. 또 다시 무너져내린다.
그래, 그게 우리들의 한계니까.
+
혼자 남겨진 그날부터 이면의 그림자를 쫓았다.
그건, 무의미하게 소멸해버린 이면에 대한 속죄일지도 모르지..
네가 포기해버린 행복을 내가 가질 수가 없었으니까.
난 죄인이기에.
생의 실감이 없는 하루하루의 연속.
괴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실망도 없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나에게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침전하는 날들 속에서 이면을, 너를 잊어갔다.
고통만 느낄 수 없다면, 나에게는 그게 행복인 걸까.
그 거짓 행복 속에서 처음으로, 미래를 고민했다.
조금씩,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기에.
미래를 갖고 싶었어.
*
...기대를 했다.
원래부터 나에게 없었던 미래를, 빛을.
살아서 다시 고통받고 싶지 않았기에 죽고 싶었던 건데.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왜 살아서 이런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걸까. 왜.
그대로 죽었으면 모두가 다 행복했을텐데..
대체 왜 살아있는 거야.....
-
삶을 조금 더 유예 받은 주제에 미래를 가지고 싶다고?
하하.. 그저 웃음만 나온다.
네가 뭔데? 무슨 자격이 있길래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야?
넌 이미 망가졌어. 실패작이야. 너 따위 쓰레기는 필요 없다고.
너 같은 게 왜 살아있어?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너 따위가?
썩은 내가 나. 네가 숨쉬는 공기가 역겨워.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너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았을거야.
왜 살아났어?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잖아?
병신 주제에 그렇게도 살고 싶었냐?
뭐가 그렇게 살고 싶은데?
말해봐, 이 병신 새끼야. 근데 왜 살아있냐고!!
...네가 살았다고 해서 누구도 기뻐하지 않아.
오히려 죽어가는 널 보며 환희할테니까.
언제나 뒈질런지 고민하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 피로 속죄해.
죽을 때까지 살아있다는 죄를 갚아.
I say, I say and I say..
- but no one hears me
#-
이미 한 번은 죽었었던 나는, 아직도 존재한다. 아직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도 받지 않고, 외부로 어떤 자극도 가하지 않은 채로.
그건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어있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며, 고통이 있기에 살아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고 그 답을 죽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죽으려고 했었다.
며칠이나 지나 중환자실에서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고통으로 가득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후회스러울만큼.
그후, 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면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실감도 잃어버렸다.
살아있다는 실감이라던가 하는 그런 것들.
생의 실감을 얻기 위해 다시 한 번 피를 흘려도 보았지만,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았다.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타인을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가 괴로웠고 소중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괴로워했었던 타인과의 관계마저도 환멸이라는 이름의 가벼움으로 가득해.
아무리 상처내고 피를 흘려도, 이면과 대립하며 살아있음을 자각했던 나는
이면이 사라진 지금 더 이상 살아있음을 자각할 수 없다.
그렇게나 죽음을 원했었던 건,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살아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니까.
관계의 어긋남을 원했었던 건, 그만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이제는- 모든 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나는- 이미 한 번은 나를, 당신을, 모두를 버렸는 걸.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죽여가며 살았던 가면과 이면도,
등지고 있는 그 빛을 모아주고 싶었던 소중했던 누군가도, 모두.
그러니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
너무나 괴로웠었지만, 그래서 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보답받고 싶었던 그날들로.
'삶과 죽음의 줄다리기' 라고 불렸던 그날들은 어쩌면 '삶과 행복의 줄다리기' 가 아니었을까.
이면이 있었기에 행복을 꿈꿀 수 있었고,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정말로 행복을, 구원을 꿈꾸지 않으니까.
...지금은 그저 죽어가는 나날들이면, 충분해.
-#
cause I can't hear..
다시 깨어난 그날, 그곳에 이미 너는 없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서로를 죽이려 할 뿐이었을 우리는
이제는 그렇게.. 과거라는 단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괴로운 기억이 되어버렸다.
나를 대신하여 희생한 너에게도, 대신 살아남은 나에게도.. 모두.
가면이라는 복수와, 이면이라는 광기.
어느사이엔가 우리들은 서로를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
원하지 않았어도 필요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너와 나는
그렇게 가면을 통해 타인을 속이고 복수하며, 이면을 통해 서로를 죽여왔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나날들이 괴로웠어도, 죽음이라는 끝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언젠가 죽음이라는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리고 그건.. 저주이기도, 동시에 구원이기도 했다.
항상 주변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외롭지는 않았다.
언제나 나에게는 '너' 라는, '이면' 이라는 죽여야 할 대상이 있었으니까.
그건 결과적으로 증오하는 것도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혼자라도 살아갈 수 있었다. 타인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이면이라는 네가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면서도 내게 양보했던 미래이기에.
나는 네 행복을 대신할 만큼의 미래를 가질 수 있을까.
혼자서 짊어지는 희생의 가치가 너무나 무거웠다. 혼자라는 것이 괴로웠다.
손을 내밀어도 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좋았을텐데.
아니, 어쩌면 거절당하는 것을, 뿌리쳐지는 것을 몰랐다면 더욱더.
그렇게 또 다시 과거의 어긋남을, 반복을 현재에서 바라본다.
이면을 잃고 혼자서 살아가는 나날들.
나를 부정하는 현실만이 가득한 곳에서,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혼자서 발버둥쳤다.
경멸받지 않기 위해, 나를 경멸하는 타인을 부정하지 않았다.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면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결과를 가지고 싶었다.
결과를 가질 수 없다면, 결국 너의 희생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테니.
하지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약해빠진 나는 혼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항상 '이면' 이라는, '살인' 이라는 힘을 빌려왔었기에.
나를 죽이고 또 죽여가며 뒤쳐지지 않기 위해 몰아세웠다.
스스로가 정한 최소한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런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그럴 때마다 광기로 뒤틀려버린 '이면' 을 이용해 어김없이 피를 흘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빛나는 당신들 속에서 서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존재 가치를 부정당한 채, 한 순간도 살아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면' 이 없었다면 쓰레기인 지금에조차 이르지 못했을테니.
'이면'을 잃어버린 지금의 나는 조금도 나아갈 수가 없어.
타인으로부터, 현실로부터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떠한 결과조차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다시 혼자서 걸어가야하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는데, 아무도 없잖아.
돌아오는 건 말 없는 침묵 뿐이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또 나를 버릴테니.
이제 기대하는 건, 아픈 건 충분하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새로운 '이면' 을 필요로 해.
그건 언젠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그때도 이면을 선택할 것이라는,
복수를 선택할 것이라는 먼 지난 날의 맹세.
이 선택이 결국 다시 깨어나게 된 나를 죽이는 것일지라도,
나를 대신해 희생한 과거의 이면을 배신하는 것일지라도, 상관없어.
현실이 결과만으로 판단한다면, 나 역시도 다르지 않아.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면 그 희생마저도 헛된 것이 되어버릴테니까.
무가치하게 살아남는 것보다, 다시 피를 흘리더라도 나아가는 게 모두가 나에게 바라는 일이잖아.
다시 깨어난 그날 이후로, 그 누구도 내가 다시 깨어났음을 기뻐하지 않았던 것처럼.
차라리 넌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이 죄인인 너의 죄.
살아있는 한, 살아있기 위해 날 죽여야만 하는 모순과
복수라는, 살인이라는 나를 숨쉬게 하는 이유.
그래.. 그것이 너와 나의 계약이자, 대가.
지금의 나는 복수라는 이름의 가면일 뿐이니까.
죄인이자, 복수자로서 타인의 도움 따위를 기대할 바에는 차라리 날 죽이겠어.
봐, 결국에는 다시 피를 갈구하게 될 거라고 했잖아?
절대로 넌 '계약' 이라는 굴레에서, '살인' 이라는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넌 '살인' 이라는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병신이니까.
애초부터 그게 너를 살리게 하고 있는 힘이자,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잖아?
사실은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면서.
아니, 벗어날 수가 없겠지.
그것들이 없는 넌 결국 그 더러운 목숨을 추악하게 연명하고 있을 뿐일테니까.
그래, 언제나 넌 어긋날 뿐이었어.
누군가가 너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할 수록 넌 더욱더 어긋났지.
웃기지 않아?
칼을 내려놓게 만들고자 했었던 사람들 덕분에 이제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내고 있다니.
당신들은 한 번도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거야.
가면이라는 복수의 냉혹함을, 이면이라는 광기의 저주를.
아아.. 그래. 기괴하고, 추악하고, 역겨워.
억지로 들춰냈으면서, 결국 스스로 그 더러움에 고개를 돌리지.
그게.. 나와 당신들의 거리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다시, 눈을 뜨고 기억해 내.
'이면' 이라는 광기를, '죽음' 이라는 안식을.
두 번 다시 실수 같은 건 없어.
이번만큼은 정말로 죽여버릴테니까.
...지금 살아있는 걸, 그때 죽지 못할 걸 후회하게 해줄게.
곧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게 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