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이 죽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언제나 스스로를 상처내며 죽음이라는 공포와 마주했던, 또 다른 나.
자해의 주체이기도 했고, 그 절실함의 근원이기도 했다.
언제나 나는 그 이면 뒤에 숨어있었을 뿐.

그런 이면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절실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난.. 내 나약함을 그 절실함에 기댈 수 있었기에.

내가 얼마나 이면에 의지하고 있었는지, 이면이 죽어버린 후에야 알게됐다.
피를 흘릴 수 없는, 자신을 죽일 수 없는 나는 얼마나 한심한지도.

상처를 내지 않고는 타인과 관계하는 법을 모른다.
그게 우리들이 서로에게 관계하는 방법이었으니까.
피를 흘리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모른다.
그것만이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피를 흘리며 흉내내도, 지금은 그 절실함이 없다.
그저 더 상처를 내라는, 피를 흘리라는 강박과 현실과의 타협만이 있을 뿐.
그렇게 어디까지나 죽어버린 이면의 발자취를 쫓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희석되어버린 증오와 목표를 상실해버린 복수.
그리고 그렇게나 증오했던, 약해빠진 자신으로의 회귀.
그 절실함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냐.
무언가를 죽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으면서.
점점 더 어긋나며 강도를 더해갔던 절규들이 이렇게나 남아있는데
이제와서, 모든 걸 없었던 걸로 하고싶은 거냐.

...증오가 부족하기 때문이야, 이렇게까지 망가진 건.
그러니 겨우 이 정도 상처 가지고 아프다고 난리지.
웃기지않냐? 봉합술을 받지 않고서는 아물지 않을 정도까지의 상처도 냈던 주제에
겨우 조금 벌어진 자상 가지고 아프다니.
하하.. 정말 어디까지 타락해버린 거냐, 너.

이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무리 네가 꾸며낸 거짓으로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거야.
봐, 이게 현실이야.
넌 또 다시 이렇게 피가 흘러내리는 칼을 잡고 있다는 걸.

정말 오랜 시간과 수많은 상처.. 그리고 피를 흘리며 만들어냈던, 이면.
다시 한 번 더, 그 광기어린 절실함이 필요해.
이면이 죽어버렸다면, 새로 만들면 돼.
그 대가로 또 다시 끔찍한 고통 속에 혼자서 죽어갈 뿐일지라도.
잊지마, 심장을 죄여오는 그 고통을.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걸어가자. 복수, 나의 끝을 향해.
이미 그 대가의 지불은 시작됐으니까.
Posted by s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