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y, I say and I say..

- but no one hears me

#-

이미 한 번은 죽었었던 나는, 아직도 존재한다. 아직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도 받지 않고, 외부로 어떤 자극도 가하지 않은 채로.
그건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어있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며, 고통이 있기에 살아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고 그 답을 죽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죽으려고 했었다.

며칠이나 지나 중환자실에서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고통으로 가득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후회스러울만큼.
그후, 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면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실감도 잃어버렸다.
살아있다는 실감이라던가 하는 그런 것들.
생의 실감을 얻기 위해 다시 한 번 피를 흘려도 보았지만,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았다.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타인을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가 괴로웠고 소중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괴로워했었던 타인과의 관계마저도 환멸이라는 이름의 가벼움으로 가득해.

아무리 상처내고 피를 흘려도, 이면과 대립하며 살아있음을 자각했던 나는
이면이 사라진 지금 더 이상 살아있음을 자각할 수 없다.
그렇게나 죽음을 원했었던 건,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살아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니까.
관계의 어긋남을 원했었던 건, 그만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이제는- 모든 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나는- 이미 한 번은 나를, 당신을, 모두를 버렸는 걸.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죽여가며 살았던 가면과 이면도,
등지고 있는 그 빛을 모아주고 싶었던 소중했던 누군가도, 모두.

그러니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
너무나 괴로웠었지만, 그래서 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보답받고 싶었던 그날들로.
'삶과 죽음의 줄다리기' 라고 불렸던 그날들은 어쩌면 '삶과 행복의 줄다리기' 가 아니었을까.
이면이 있었기에 행복을 꿈꿀 수 있었고,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정말로 행복을, 구원을 꿈꾸지 않으니까.

...지금은 그저 죽어가는 나날들이면, 충분해.

-#

cause I can't hear..

Posted by s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