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난 그날, 그곳에 이미 너는 없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서로를 죽이려 할 뿐이었을 우리는
이제는 그렇게.. 과거라는 단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괴로운 기억이 되어버렸다.
나를 대신하여 희생한 너에게도, 대신 살아남은 나에게도.. 모두.

가면이라는 복수와, 이면이라는 광기.
어느사이엔가 우리들은 서로를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
원하지 않았어도 필요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너와 나는
그렇게 가면을 통해 타인을 속이고 복수하며, 이면을 통해 서로를 죽여왔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나날들이 괴로웠어도, 죽음이라는 끝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언젠가 죽음이라는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리고 그건.. 저주이기도, 동시에 구원이기도 했다.

항상 주변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외롭지는 않았다.
언제나 나에게는 '너' 라는, '이면' 이라는 죽여야 할 대상이 있었으니까.
그건 결과적으로 증오하는 것도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혼자라도 살아갈 수 있었다. 타인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이면이라는 네가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면서도 내게 양보했던 미래이기에.
나는 네 행복을 대신할 만큼의 미래를 가질 수 있을까.
혼자서 짊어지는 희생의 가치가 너무나 무거웠다. 혼자라는 것이 괴로웠다.
손을 내밀어도 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좋았을텐데.
아니, 어쩌면 거절당하는 것을, 뿌리쳐지는 것을 몰랐다면 더욱더.
그렇게 또 다시 과거의 어긋남을, 반복을 현재에서 바라본다.

이면을 잃고 혼자서 살아가는 나날들.
나를 부정하는 현실만이 가득한 곳에서,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혼자서 발버둥쳤다.
경멸받지 않기 위해, 나를 경멸하는 타인을 부정하지 않았다.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면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결과를 가지고 싶었다.
결과를 가질 수 없다면, 결국 너의 희생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테니.

하지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약해빠진 나는 혼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항상 '이면' 이라는, '살인' 이라는 힘을 빌려왔었기에.
나를 죽이고 또 죽여가며 뒤쳐지지 않기 위해 몰아세웠다.
스스로가 정한 최소한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런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그럴 때마다 광기로 뒤틀려버린 '이면' 을 이용해 어김없이 피를 흘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빛나는 당신들 속에서 서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존재 가치를 부정당한 채, 한 순간도 살아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면' 이 없었다면 쓰레기인 지금에조차 이르지 못했을테니.

'이면'을 잃어버린 지금의 나는 조금도 나아갈 수가 없어.
타인으로부터, 현실로부터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떠한 결과조차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다시 혼자서 걸어가야하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는데, 아무도 없잖아.
돌아오는 건 말 없는 침묵 뿐이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또 나를 버릴테니.
이제 기대하는 건, 아픈 건 충분하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새로운 '이면' 을 필요로 해.
그건 언젠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그때도 이면을 선택할 것이라는,
복수를 선택할 것이라는 먼 지난 날의 맹세.
이 선택이 결국 다시 깨어나게 된 나를 죽이는 것일지라도,
나를 대신해 희생한 과거의 이면을 배신하는 것일지라도, 상관없어.
현실이 결과만으로 판단한다면, 나 역시도 다르지 않아.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면 그 희생마저도 헛된 것이 되어버릴테니까.
무가치하게 살아남는 것보다, 다시 피를 흘리더라도 나아가는 게 모두가 나에게 바라는 일이잖아.
다시 깨어난 그날 이후로, 그 누구도 내가 다시 깨어났음을 기뻐하지 않았던 것처럼.

차라리 넌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이 죄인인 너의 죄.

살아있는 한, 살아있기 위해 날 죽여야만 하는 모순과
복수라는, 살인이라는 나를 숨쉬게 하는 이유.
그래.. 그것이 너와 나의 계약이자, 대가.

지금의 나는 복수라는 이름의 가면일 뿐이니까.
죄인이자, 복수자로서 타인의 도움 따위를 기대할 바에는 차라리 날 죽이겠어.


봐, 결국에는 다시 피를 갈구하게 될 거라고 했잖아?
절대로 넌 '계약' 이라는 굴레에서, '살인' 이라는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넌 '살인' 이라는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병신이니까.
애초부터 그게 너를 살리게 하고 있는 힘이자,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잖아?
사실은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면서.
아니, 벗어날 수가 없겠지.
그것들이 없는 넌 결국 그 더러운 목숨을 추악하게 연명하고 있을 뿐일테니까.

그래, 언제나 넌 어긋날 뿐이었어.
누군가가 너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할 수록 넌 더욱더 어긋났지.
웃기지 않아?
칼을 내려놓게 만들고자 했었던 사람들 덕분에 이제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내고 있다니.

당신들은 한 번도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거야.
가면이라는 복수의 냉혹함을, 이면이라는 광기의 저주를.
아아.. 그래. 기괴하고, 추악하고, 역겨워.
억지로 들춰냈으면서, 결국 스스로 그 더러움에 고개를 돌리지.
그게.. 나와 당신들의 거리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다시, 눈을 뜨고 기억해 내.
'이면' 이라는 광기를, '죽음' 이라는 안식을.
두 번 다시 실수 같은 건 없어.
이번만큼은 정말로 죽여버릴테니까.

...지금 살아있는 걸, 그때 죽지 못할 걸 후회하게 해줄게.
곧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게 될테니.

Posted by s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