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난 대학 병원의 중환자실에 있었다.
온몸에 연결된 호스들과 전기선들.
이미 약을 먹은 그날로부터 7 일이 지난 후였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
그 7 일 동안 난 여러 병원의 중환자실을 옮겨다녔다고 했다.
과다복용의 부작용으로 의식이 없는 건 물론 폐까지 절반이 오염된 상태.
약물에 의한 흡입성 폐렴으로 산소 포화도가 90 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무호흡 상태도 진행되어 이제는 산소 호흡기까지 필요했다.
이대로 산소 포화도가 90 을 넘지 못할 경우,
기도를 절개해 호스를 연결하는 기도 삽입술까지 고려 중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상태가 많이 회복된 후였다.
산소 포화도도 90 을 간신히 넘겼고 위세척으로 약물 또한 몸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와 고열의 몸은 내가 누워있는 사이 피부 조직을 괴사시켜버렸다.
괴사해버린 피부 조직은 다시 회복되지 않고 제거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병원 측에서는 일단은 나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는 밤은 공허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과 간호사들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환자들의 신음.
여전히 순간순간 파고드는 고통으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혼란. 아직도 기억이 이리저리 뒤섞여있다.

멈추지 않고 고통스럽게 흘러가는 시간만이 죽지 않았다는 자각을 준다.
...어째서 난 또 살아있는걸까.
구역질을 참아가며 어떻게든 삼켜냈던 62 일치의 약물.
62 일치. 그게 반 년 동안 모았던, 내가 가진 모든 양이었다.
그래, 이번만큼은 정말로 죽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죽을 위기까지 있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이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왜 지금 다시 눈을 뜨게 된걸까.
...그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했으면 좋았을텐데. 모두가 기뻐했을텐데.
그 기억으로 이제 난 약 한 알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게 됐다.
아니, 그때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꼈다.

아침이 되고 곧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병실 안에서, 7 일만에 다시 마셔보는 물은 마시는 순간 구역질이 나왔다.
위세척 약품이 아직도 입에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어차피 이미 거의 다 흡수되어버려 위세척은 필요도 없었을텐데.

내가 눈을 뜬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했다.
병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은 여전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가득 매달린 항생제들과 영양제들 그리고 여전히 몸에서 뽑아내지 못하는 호스들.
순간, 걷지조차 못하는 내 상태가 우스웠다. 우스워서 비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죽지조차 못하는 병신이구나, 나.

만약 그대로 내가 죽었더라면, 누군가는 슬퍼해줬을까.
아니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게 될까.
아무래도 후자겠지.
잃어버리고 싶지않다고 말했으면서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오래전부터 준비해놨었으니까.
아프기 때문인지, 아니면 끝이라고 생각했었던 현실이 이어졌기 때문인지..
고통만이 가득한 지금의 현실에서 문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되는거겠지..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
내가 밀어냈으니까, 죽을거라고 생각했었기에 아무도 남겨놓지 않았으니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렇게 혼자서만 죽어가는거야.

비록 전부 다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일부는 죽어버렸으니까.
내가 나를 죽이려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과 나.
...다시 살아있게 된 나는 여전히 똑같구나.
만약 그 순간 누군가 옆에 있었더라면, 털어놓을 뻔 했을테니까..
타인을 향한 기대와 실망. 설령 오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난 풀지 않겠지..
여전히 내 피 묻은 손은 거절당한 채 그대로가 좋아.
그래야만.. 언젠가 난 다시 복수를 선택할 수 있을테니까.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해서 깨어나 굳이 원했던 건 아니지만 새벽 하늘을 볼 수가 있었다.
...아침은 눈이 부셨다.
그렇게 시작된 병실 창가로 비치는 크리스마스의 하루.
병실에서의 하루는 그 하루하루가 다 똑같다.
진통제로 고통을 버티고 흘러가는 시간을 잡지 않아.
매 시간마다 기계적으로 삼켜내는 음식과 겹쳐지는 기억들.
나에게 크리스마스라는 건 혼자라는 걸 더욱더 일깨워주는 날이었다.
웃기는 일이야, 이런 주제에 타인에게 실망한다는 건..

내가 약을 먹은 그 다음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병실에서 접한 할머니의 사망 소식.
내가 의식을 잃은 그 7 일 동안 장례식까지 모두 끝나있었다.
떠나시기 전, 할머니는 나를 계속해서 찾으셨다고 했다.
가족들은 차마 나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겠지.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죽을 위기를 넘기고 있다는 사실 대신,
...시험이라 바빠서 올 수가 없다고.
할머니는 그 순간에 이런 나를 용서했을까.
자신의 마지막조차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던 손자를.. 용서했을까.
담담히 할머니의 마지막을 들었다.
친척들은 나를 대신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했다.
...그럴리가 없잖아.
죽음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건데, 너무나 공허해서 고독조차 외로운건데.
그러니까 누구도 죽고싶어하지 않는건데.
내 기억의 일부를, 살아온 시간의 일부를 공유했던 사람. 그 존재가 이제는 소멸해버렸다.
내가 죽겠다고 발악을 하고 정신을 잃은 사이.. 그렇게.
그 순간이 마지막인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드렸을걸..
이제는 자신에게 화조차 나지 않았다. 화낼 가치조차 없어.
결국 난.. 거기까지고, 그런 인간일테니.

다시는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내일을 맞이하고 나를 맞이한다.
예외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이러고도 살아있다는 자체가 나에겐 패닉이었다.
복수를 맹세했던 순간부터, 나와 계약한 순간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었으니까.
62 일치로는 부족했던걸까. 조금만 더 모아 삼켜냈었더라면, 그때는 정말로 죽을 수 있었을까.
그런 자책들이 쏟아져내린다.
일부분만이 죽어버린 나는.. 누구인걸까.
복수만을 바라봤던 복수자? 아니면 숨죽여 구원을 기다렸던 낙오자?
텅 비어버린 나는 이제 뭘로 채워야만 하는걸까.

예전의 나에게 왠지모를 지독한 이질감을 느낀다.
괴로워했던 시간들도, 복수 밖에 바라볼 수 없었던 시간들도,
흘러내리는 피로 물들었던 그 시간들도 모두 기억할 수 있는데 어째서일까.
그 기억이 내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들만 공허히 맴돈다.
여전히 복수의 흔적들은 몸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데.
타인이 기억하는 과거의 나는,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는.. 누구였을까.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결국 난 잃어버렸구나..
옆에 있어달라는 말은, 너무나 큰 욕심이었다는 걸 잘 알고있었는데도..
결국 내 모순이 상처입힌 대가는, 죄값은 나만의 몫이니까..
미안했어. 그리고 미안해.

언젠가는 지금의 나 역시 과거의 나처럼 또 다시 복수를 선택하게 될 것을 알아.
살아있다는 실감이 없으니까, 여전히 안식을 바라니까.
그때는.. 더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괜찮아.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이미 한 번은 죽었을테니..

Posted by sey :